어느 날 고궁(古宮)을 나오면서(1974, 거대한 뿌리) - 김수영
어느 날 고궁(古宮)을 나오면서(1974, 거대한 뿌리) - 김수영  
왜 나는 조그마한 일에만 분개하는가 
저 왕궁(王宮) 대신에 왕궁(王宮)의 음탕 대신에 
오십(五十) 원짜리 갈비가 기름덩어리만 나왔다고 분개하고 
옹졸하게 분개하고 설렁탕집 돼지 같은 주인년한테 욕을 하고 
옹졸하게 욕을 하고 
한 번 정정당당하게 
붙잡혀간 소설가를 위해서 
언론의 자유를 요구하고 월남(越南)파병에 반대하는 
자유를 이행하지 못하고 
이십(二十) 원을 받으러 세 번씩 네 번씩 
찾아오는 야경꾼들만 증오하고 있는가 
옹졸한 나의 전통은 유구하고 이제 내 앞에 정서(情緖)로 
가로놓여 있다 
이를테면 이런 일이 있었다 
부산에 포로수용소의 제사십야전병원(第四十野戰病院)에 있을 때 
정보원이 너어스들과 스폰지를 만들고 거즈를 
개키고 있는 나를 보고 포로경찰이 되지 않는다고 
남자가 뭐 이런 일을 하고 있느냐고 놀린 일이 있었다 
너어스들 옆에서 
지금도 내가 반항하고 있는 것은 이 스폰지 만들기와 
거즈 접고 있는 일과 조금도 다름없다 
개의 울음소리를 듣고 그 비명에 지고 
머리에 피도 안 마른 애놈의 투정에 진다 
떨어지는 은행나무잎도 내가 밟고 가는 가시밭 
아무래도 나는 비켜 서 있다 절정(絶頂) 위에는 서 있지 
않고 암만해도 조금쯤 옆으로 비켜서있다 
그리고 조금쯤 옆에 서 있는 것이 조금쯤 
비겁한 것이라고 알고 있다! 
그러니까 이렇게 옹졸하게 반항한다 
이발쟁이에게 
땅주인에게는 못하고 이발쟁이에게 
구청직원에게는 못하고 동회직원에게도 못하고 
야경꾼에게 이십(二十) 원 때문에 십(十) 원 때문에 일(一) 원 때문에 
우습지 않으냐 일(一) 원 때문에 
모래야 나는 얼마큼 적으냐 
바람아 먼지야 풀아 나는 얼마큼 적으냐 
정말 얼마큼 적으냐……